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대 그리스 (문단 편집) === [[여성]]의 지위 ===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상당히 낮았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시민권은 오직 '''성인 남성'''에게만 한정된 개념이었고 여성들은 이 권리를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리스 여성들은 법적 권리도 없어서 남성들의 부속품으로 취급받았고, 남성 가주 '키리오스'가 소유한 가재도구인 '오이코스'의 일부로 여겨졌던 것이다. 애초에 [[고전 그리스어]]로 아내를 의미하는 단어 '다마르'가 '복종하다', '종속되다'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을 정도니 당시 여성들의 지위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여성들은 결혼 전까지는 제 아버지의 소유물로 여겨졌고 결혼 후에는 당연히 제 지아비의 소유물로 여겨졌다. 남성의 평균 결혼 연령은 30세였고 여성의 평균 결혼 연령은 14세였다. 여성들이 [[월경]]이 막 시작된[* 지금이야 영양 환경이 좋아지며 그보다 더 어린 나이에 [[월경|초경]]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당시에는 영양 상태가 열악해 보통 14세 언저리 즈음에 초경을 시작했다.] 바로 직후부터 결혼 생활을 시작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일찍 여자를 결혼시킨 이유는 여자가 [[처녀]]를 유지하는 시점에 최대한 빨리 시집을 보내야 한다는 이유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Longmaid.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7379413-orig-1.jpg|height=300]]}}} || 그나마 가장 민주적이라고 여겨졌던 아테네에서도 여성들의 지위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여성들은 재산권이 크게 제한되었으며 참정권 역시 당연히 없었다. 그나마 남자 가주가 여성을 제외하면 그 어떠한 남성 상속자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 일시적으로 여성에게 재산이 상속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걸 '에피클레로스' 제도라고 불렀다. 허나 이는 철저하게 임시 조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성이 결혼하면 그 남편에게 재산이 모두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은 제 남편이 죽기 직전에 지정한 남자에게 강제로 시집가는 경우가 빈번했고, 보리 한움큼보다 낮은 가치의 물건들만 사고팔 수 있도록 제한을 걸어두면서 상업 행위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테네에서는 심지어 길바닥에서 굴러다니던 거지조차 시민권이 있다면 참정권이 주어졌지만 여성들은 아무리 출신이 고귀하다고 해도 절대로 정치에 뛰어드는 게 불가능했다. 의외로 '''[[스파르타]]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다.''' 시민들 사이에서 평등 하나만을 외치던 스파르타였고, 건강한 여성이 건강한 전사를 출산할 수 있다는 믿음 하에 여성들에게도 끊임없이 남자들처럼 운동을 시키고 체계적인 교육을 시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편들이 모조리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가 전사하는 경우가 지나치게 흔했기 때문에 여성들에게는 집의 재산을 처분할 권리도 주어졌다. 남편과 남자들이 모두 전쟁에 나가서 전투를 벌이고 있으면 집에서 여자들이 가사와 재산을 관리했던 것이다. 재산권도 없고 처분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다른 폴리스들과 비교하면 천지차이였다. 스파르타 여성들은 20세 이전에 결혼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고, 어린 시절부터 몸을 드러내고 고된 훈련을 받아야했기에 사상도 굉장히 자유로웠다. 아테네 여성들은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몸을 가려야했던 반면 스파르타 여자들은 짧은 드레스를 입고 원하는 대로 돌아다니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역시 가장 핵심적인 참정권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으며, 집회에서 발언하는 것 역시 금지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파르타 여성들이 지나치게 개방적이고 퇴폐적이라면서 스파르타의 무책임한 사회 질서가 그 원인이라고 대놓고 비판한 적도 있다.] 의외로 [[이혼]]할 권리는 보장된 편이었다. 양측이 모두 이혼을 원하거나 한 측만 이혼을 원한다고 해도 바로 결혼생활을 끝낼 수 있었다. 다만 남성은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바로 파혼을 요구할 수 있었지만 여성의 경우 제대로 된 시민으로 대접받지 못했기 때문에 남성 대리인을 내세워서 이혼 신청을 해야만 했다. 주로 시아버지나 여성의 형제들을 내세우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이혼이 성립되면 결혼시 여성이 가지고 왔던 [[지참금]]은 고스란히 외가에 돌아갔고, 결혼 생활 동안 쌓은 부의 절반을 나누도록 했다. 다만 [[양육권]]의 경우 무조건적으로 가주 역할을 맡은 남자에게 돌아갔다. 다만 이렇게만 보면 양육권을 제외하고 얼핏 공정해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이혼이라는 행위 자체는 썩 사회적으로 달가운 일이 아니었고, 사회적인 평판이 하락하는 일이었기에 남성들은 이혼을 꺼렸으며 여성들은 이혼녀 신분으로 재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로 이혼이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아무리 남자가 깽판을 친다고 해도 집에서 참고 사는 일이 더욱 빈번했다고 한다. 이런 그리스에서도 어느정도 권리가 보장된 여성들이 있었는데 [[코린토스]]의 아프로디테 신전 여사제들인 헤타이라(hetaira)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사실 꼭 아프로디테 신전의 여사제만이 아니라 코린토스의 풍습을 들여온 다른 폴리스의 고급 매춘부들도 이렇게 불렸다. 코린토스의 헤타이라가 가장 유명하긴 했지만 말이다.] 코린토스는 [[아프로디테]]를 도시의 수호신으로 삼았고, 아름다움과 사랑을 지고의 가치로 삼는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 코린토스로 모여드는 뜨내기들을 상대로 [[매춘]]도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코린토스 중심에 세워진 아폴론 신전의 여사제들이 맡았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 일로 엄청난 고수익을 챙긴 곳은 코린토스의 남쪽에 우뚝 솟은 아크로코린토스에 있던 아프로디테 신전이었다. 그들은 시장의 길거리에 늘어서 있던 포르네(pornē)들과는 다르다며, 스스로를 헤타이라(hetaira)라고 불렀는데, '친구, 전우, 동반자'라는 뜻이었다. 어쨌든 코린토스를 통해 이오니아해와 에게해를 오가며, 멀리는 이탈리아반도와 소아시아를 잇는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번 상인들이 코린토스에 머물면서 신비롭고 아름다운 여사제들과의 사랑을 탐닉하며 돈을 아낌없이 탕진했다. 여기서 일하는 아프로디테의 사제들인 고급창녀들, 즉 헤타이라들은 남성 중심의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드물게도 여성으로써 존재감을 드러냈던 이들이었다. 아프로디테 신전에 갖다 바칠 제물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여사제들이 매춘을 했다. 한결같이 뛰어난 미모를 지닌 여자들을 사제로 선발했기 때문에 어지간한 재력의 남자들은 감히 이 여사제들을 만날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최고급 헤타이라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훈련이 필요했다. 의복을 바르게 입고 화장을 잘하는 것도 중요했다. 남성의 욕구와 소망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했다. 헤타이라는 능숙한 대화력을 갖춰야 했고 지성이 뛰어나야 했으며 과거의 전통 문학과 당대의 그리스 문학에도 밝아야 했다. 그리스 사회에서 매춘부는 4종류가 있었다. 일일노동자의 하루치 임금이던 1오볼로스(6드라크마)에 몸을 팔았던 딕테이라데스(포르나이), 가무악(歌舞樂)의 예능을 익혀 연회의 흥을 돋웠던 아울레트리데스, 대부분 남성을 상대했던 미소년 남창 카타미테스, 그리고 연회에서 부유한 남성의 파트너 역할을 수행하며 하룻밤 화대로 1미나(100드라크마)를 받았던 헤타이라다. 일반 매춘부의 삶은 노예와 다를 바 없었지만 코린토스의 풍습을 아테네인들이 받아들이면서 생긴 아테네의 최고급 매춘부인 헤타이라는 엄청난 부와 권력을 향유하며 최고 권력자까지 쥐락펴락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에피쿠로스의 애제자였던 레온티온과 아테네의 공동통치자란 평판을 얻었던 아스파시아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에 비길 만하다. 이 당시 아테네의 헤타이라들은 남성들과 지적으로 교류하면서 아테네 엘리트들의 공적 공간인 심포시온에 드나들었고 아스파시아의 경우에서도 드러나듯이 몇몇 헤타이라의 경우에는 심포시온을 직접 개최하여 아테네 엘리트 계층과 교우하기도 했다. 헤타이라는 그리스의 종교적인 분야에도 적극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했다. 헤타이라는 성소나 신전에 별다른 제약 없이 출입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종교적 의례의 모든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헤타이라는 아테네 최고의 축제인 판아테나이아 축제나 테즈모포리아 축제와 같이 범아테네적 제전 뿐 아니라 엘레우시스 밀의나 디오니소스 밀의와 같은 비밀 종교행사에도 참여하는 등의 일반 여성과는 다른 자유를 누렸다.[[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79819200|관련 논문]] 특히 헤타이라 [[아스파시아]](Aspasia)는 명연설가로 유명했던 연인 [[페리클레스]]의 웅변술 교사이자 [[플라톤]]의 향연에 등장하는 지혜로운 여인 디오티마의 모델이란 찬사를 받았다. 그녀는 논리적인 설전력을 갖춘 철학의 논쟁가로 평판이 높았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아스파시아를 가리켜 정치와 국가에 대해 폭넓은 이해력을 지닌 뛰어난 여성이라고 평가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그의 친구와 학생들을 데리고 그녀의 철학 강의에 참석했으며, 대중을 상대로 하는 거리 강의에도 참석했다. 페리클레스가 민주 정치를 꽃피우는 데도 그녀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정치적으로 개입해 권력을 얻은 사건은 당시 아테네 사회의 큰 논쟁거리였다. 아스파시아는 헤타이라 육성을 위한 가이나키움(gynaceum)이라는 학당을 소유하고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그 외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 영감을 준 모델인 라이스나 재판정에서 자신의 나체를 드러내 "[[예쁘면 모든 게 용서된다]]"라는 신화를 만든 프리네[* 당시에는 외양의 아름다움을 곧 선량함, 훌륭함, 그 외 온갖 덕목과 동일시하는 외모지상주의적 풍조가 심했다. 이 프리네란 인물은 신성모독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됐는데, 재판관들 앞에서 옷을 벗어 아름다운 나체를 드러내 보이자 재판관들이 전술한 논리에 따라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신성모독 죄인일 리 없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가 유명하다.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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